여름의 끝자락일까?
습하지 않아 지붕 아래 있을 땐 섭섭할 만큼 여름인 줄도 모르겠던데, 이따금 LA의 따가운 햇살 아래 있을 때면 아 지금 여름이지 싶더랬다.
뉴스에서 한국이 역대 최장 열대야를 겪고 있다, 친구들이 어항 속의 물고기가 된 것 같다 할 때면 하루에도 아침점심저녁으로 샤워를 세 번씩 하던 게 그리워질 때도 있구나 싶다. 날씨 좋다. 바람이 시원하다. 그럼에도 한국의 눅눅한 온기가 그립다는 게 이상하다. 괜시리 우산을 쓰고 싶다. 장화를 신고 싶다. 평생 맑은 나라에 사는 사람은 몰래 눈물을 흘리지 못해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올해 한국의 여름이 벌써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객관적인 좋음은 모든 것에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창밖으로 흔들리는 야자수와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하늘은 너무 완벽해서 이질감이 든다. 좋음은 주관적이다. 느끼는 주체의 기분, 상태, 환경에 따라서 아무리 좋은거래도 때에 따라 와닿지 않는다. 캘리포니아 오렌지가 아무리 달아도, 나는 개구쟁이처럼 눈이 찌뿌려질 만큼 셔도 좋으니 제주산 한라봉이 먹고싶다. 향수병인가? 캘리포니아 겨울도 한국만큼 추웠으면, 추워서 손이 빨개지도록 덜덜 떨리고 숨을 쉴 때 내 온기가 보인다면 나는 비로소 스스로가 보일까?
일주일 후면 가을 학기가 개강한다. 나는 휴학생인데, 동시에 대학생이다. 처음 든 생각은 아, 아침마다 운전해서 또 등교 어떻게 하지?
출퇴근 시간마다 어김없이 막히는 캘리포니아의 10번 고속도로는 동서로 쭉 뻗어있다. 동쪽 끝까지 가면 플로리다 잭슨빌까지 뻗어있고 서쪽 끝까지 가면 학교. 앞에는 산타모니카 해변. 여름 학기에는 수업을 하나만 들었는데 가을 학기엔 세 과목을 신청했다. 사실 신청할 때까진 진로가 결정되지 않아서, 건축디자인 학과 전공기초를 신청했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요즘 나의 모토가 '무엇을 하든 나중에 결국 쓸모 있을 것이다.' 여서 그렇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일 많은데 될 수 있으면 작은 일에 심각하게 눈살 찌뿌리고 있지 말자는 주의다. 낙관적인 게 내 장점 중 하나이고. 경험을 해 봐서 그런가, 학교 생활이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책에서 읽었는데 걱정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즉, 알지 못해서.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럴 땐 걱정되는 일을 상상해보면 좋다. 머릿속으로 찬찬히 장소를 그려보고, 그 속에 있는 나를 그려보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다 보면 걱정이 시각화되어 줄어든다고 한다. 경험해보면 더 좋고!
행복에 관해 쓴 책들은 정말 진실일까?
목표도 생겼고, 매일매일 재미있는 일들도 분명 일어나고,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운동해도 행복은 왜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할까.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순간의 행복들로 살아가는 걸까? 그렇다면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나 도무지 불행한 순간에는 어떻게들 견디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걸까. 불행해도 그냥 불행을 가득 끌어안고 사는걸까? 순간순간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려 치열하게들 노력하는 걸까.
정답을 모르겠다. 그 모든 것 같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가, 자기 혐오에 빠졌다 남들과 비교를 반복하고, 괜찮은 척 하다가 아니란 걸 깨닫고 몇백미터 구덩이에서 혼자 웅크리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어떻게든 구덩이를 올라오고.. 햇빛을 보았다 또 다시 먹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에라 모르겠다 비를 맞는 사람과 열심히 뛰어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하는 사람들. 옳고 그른 사람은 없어. 비를 맞는 사람은 시원할테고 비를 피한 사람은 뽀송하겠지. 그래도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처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고 비를 맞는다면 네 몸이 아플 테니까. 아프지 말고 스스로를 잘 챙겨줘. 언제나는 아니래도, 가끔은 뛰어서 비를 피하자.
행복의 법칙 따위는 없다. 미국에 와서 느낀 것들 중 하나이다. 몸을 움직이면 잠시 생각이 달아나 머리가 가벼워지긴 해도, 걱정과 생각은 언제나 이끼처럼 다시 축축한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다.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로 지낸다 해도 언제든 인간관계는 틀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행복의 법칙이 아니라 나를 믿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냥 돌멩이같다. 나는 차라리 많이 부서져본 모래 알갱이가 되고 싶다.
반짝거리는 모래 알갱이. 손가락을 따라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모래 알갱이.